ai주식/주식ai : 지난 2월26일 독일 수도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 위치한 한 다세대 주택에서 니더작센주 범죄수사국과 베를린주 경찰이 긴급체포 작전을 벌였다. 좌파 테러단체 적군파(RAF)의 3세대 조직원 중 한 명인 다니엘라 클레테(65)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경찰이 초인종을 누르자 혼자 있던 그는 자신을 클라우디아 이본이라고 신원을 밝혔다. 하지만 지문 조회를 통해 그가 다니엘라 클레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30년 넘게 경찰의 추적을 따돌린 테러리스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체포되었다.

주식 :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클레테는 18년 전부터 클라우디아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살았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친절한 이웃이었다. 그는 자신이 간병인 일을 한다고 이웃을 속였으며, 지역의 브라질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브라질 전통 무술카포에라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가짜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사진을 올리거나 좌파 단체의 활동에 함께하기도 했다. 그의 집에서는 가짜 이탈리아 여권과 대전차 화기 유탄, 구소련제 소총, 현금 4만 유로, 금괴 1.2㎏도 발견되었다. 〈슈피겔〉 보도에 따르면,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은 이민자 비율이 높으며 자신을 숨기고 싶은 사람이 익명으로 거주하기 쉬운 곳이다.

1958년생 다니엘라 클레테는 열일곱 살이던 1975년부터 극좌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1978년부터는 적군파를 후원하는 모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 중 일부가 1980년대 중반부터 3세대 조직원이 되었다. 연방 검찰은 클레테가 1990년 에슈보른에 위치한 도이체방크 건물 폭발 시도를 통해 처음으로 테러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했다. 적군파 일당은 폭스바겐 자동차 트렁크에 4㎏이 넘는 폭약을 실어 은행 앞에 주차했다. 하지만 폭탄이 점화되지 않아 테러는 실패로 끝났다. 검찰은 그가 1991년 본의 미국 대사관 총격전과 1993년 헤센주의 신축 감옥 폭발까지 최소 테러 세 건에 참여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들 현장에서는 그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또 다른 적군파 조직원 부르크하르트 가르베크와 에른스트폴커 슈타우프도 클레테와 함께 수사망에 올랐다. 이 세 사람은 1993년 폭탄테러 사건을 함께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1998년 적군파가 공식적으로 해산한 이후에도 1999년부터 2016년까지 슈퍼마켓과 현금 수송 차량을 털어 은닉 자금을 마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트리오로 불리며 범행 과정에서 총기와 중무기를 사용했다.“34명 살해, 신성시할 어떤 것도 없다”

이들이 처음부터 연쇄 약탈범으로 지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5년 니더작센주의 슈투어시 약탈 현장에서 클레테와 슈타우프의 DNA가 발견되면서 니더작센주 범죄수사국은 세 사람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들 세 사람에게는 현상금 15만 유로가 걸려 있었고, 지난해 11월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신고자가 니더작센주 범죄수사국에 클레테의 은신처 정보를 제공했다.

클레테를 체포한 후, 3월3일 독일 연방 범죄수사국, 니더작센주 범죄수사국, 베를린 경찰이 가르베크와 슈타우프를 잡기 위해 좌파들이 함께 모여 사는 이동식 컨테이너 주택 지역을 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몇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지만 찾던 두 사람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다니엘라 클레테가 체포 직전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두 사람에게 자신이 체포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이미 베를린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가르베크와 슈타우프뿐만 아니라, 아직 체포되지 않은 다른 적군파 조직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생활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 네트워크가 있으리라 본다. 클레테가 체포된 이후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선 적군파 테러리스트에 대한 연대운동이 벌어졌다. 3월 초에는 ‘국가 테러를 멈춰라–은신한 사람 및 투옥된 사람과의 연대’라는 구호를 내건 시위에 600명가량이 참여하기도 했다. 낸시 페저 연방 내무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적군파는 34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여기에는 신성시할 어떤 것도 없다”라며 이들과 연대하는 시위대가 잠시라도 희생자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촉구했다.

헤센주 정치교육센터 담당관이자 역사학자인 로브레트 볼프는 〈슈피겔〉 인터뷰에서 적군파가 수많은 테러를 저질렀는데도 독일의 대중문화가 그들을 일종의 ‘힙’한 모습으로 그렸다고 비판했다. 1세대 적군파를 그린 〈바더 마인호프〉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영화 속 테러리스트들은 68혁명의 영향권에 있는 반항적 젊은이의 모습을 하고 나치 범죄자를 처단한다. 한 손에 무기를 든 반항적 테러리스트의 모습은 한편에서 여전히 숭상되고 있으며, 기후 활동가들의 도로 점거 시위와 대비되는 적극적 사회변혁 운동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런 적군파의 신화는 1세대 적군파가 감옥에서 죽으며 만들어졌다.

독일의 68혁명은 나치에 참여한 부모 세대와 전후 세대 사이의 갈등을 담고 있었다. 1960년대 독일에서는 다양한 학생 시위가 있었다. 특히 1967년 대학생 벤노 오네조르크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분위기가 과격해졌다. 학생들은 “국가가 우리 모두를 향해 총을 쐈다”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무장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스 바더와 구드룬 엔슬린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1968년 4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두 사람은 항의 표시로 다른 동조자들과 함께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두 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들은 이틀 후 체포되었고 3년 징역형을 받았다. 같은 해 5월 연방 의회는 ‘긴급조치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비상시 군대가 시민을 대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당시 청년들은 나치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파시스트적인 법이라며 비판했다.

1970년 5월 언론인 울리케 마인호프는 안드레아스 바더와 책을 저술한다는 핑계로 감옥에 있는 바더의 도서관 방문을 허가받았고, 그 기회를 이용해 바더를 탈옥시켰다. 바더와 마인호프는 이미 감옥에서 풀려난 다른 동조자들과 함께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으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은행을 약탈하고 차량을 절도했다. 그리고 1971년 마인호프가 작성한 문서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적군파(Rote Armee Fraktion)’라 칭하고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밝혔다. 이들은 적군파가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는 국제적 연대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적군파라는 이름은 소련의 붉은 군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1972년 적군파는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미군 사령부에 폭탄테러를 저지르며 공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 4명이 사망했다. 보수 언론사를 소유한 악셀 스프링어 그룹 건물에도 폭탄을 던졌다. 결국 정부는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벌여 주요 인물들을 체포했다. 체포된 후 이들은 감옥에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며 10차례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1974년 조직원 홀거 마인스가 사망했으며, 1976년에는 울리케 마인호프가 감옥에서 자살했다. 적군파는 언론을 통해 자신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들은 이로써 많은 동조자를 확보했으며, 1974년에는 사르트르가 안드레아스 바더를 면회하기도 했다. 마인스 사망 이후에는 집회 금지 조치에도 5000명 이상이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우편을 통해 적군파 해산 소식 전해

그사이 적군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2세대 적군파를 조직했다. 1977년 봄 적군파 2세대는 연방 검찰총장 지그프리트 부바크와 드레스덴 은행 총재 위르겐 폰토를 총으로 살해했다. 같은 해 9월 이들은 정부에 적군파 조직원을 석방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위해 고용주협회 회장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를 납치했다. 정부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이들은 슐라이어를 살해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적군파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이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납치했다. 이들의 요구 또한 1세대 조직원의 석방이었다. 하지만 연방 경찰의 대테러부대가 비행기 납치범들을 제압했다. 감옥에 있던 안드레아스 바더와 구드룬 엔슬린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2세대 적군파의 주요 인물들은 해외로 피신했다가 다시 돌아와 테러를 저지르다 1980년대 초반 체포되었다. 그 과정에서 3세대 적군파가 만들어졌다. 1985년 3세대 적군파는 미군 주둔 시설에 테러를 하기 시작했다. 경제계 인사들도 테러 표적이되었다. 1989년에는 도이체방크 총재인 알프레드 헤른하우스가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1991년에는 적군파의 저격수가 자택에 머물던 신탁공사의 총재 데틀레프 로베더를 살해했다. 로베더는 적군파에 의해 살해된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그 후 적군파의 활동은 점차 잠잠해져서 1993년 마지막 폭탄테러를 시도한 후로는 활동하지 않았다. 적군파는 1998년 4월 자신들의 해산 소식을 우편으로 언론에 전했다.

적군파의 테러, 특히 1977년에 연이은 사건들은 민주주의 또한 테러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독일 사회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1970년대 정부가 적군파 1세대에 강력히 대응하면서 그들을 단순 범죄자가 아닌 전쟁범죄자처럼 취급한 것이 적군파의 동조자를 불어나게 만든 원인이라는 비판도 있다. 독일 정부는 적군파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력을 대거 동원했다. 적군파 1세대의 재판이 진행되는 4년 동안 이들의 변호를 제약하기 위해 새로운 법률 6개를 제정했다.기자명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김인건#적군파#독일#테러리스트#바더 마인호프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