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 서구권에는 ‘한국인은 게임을 잘한다’는 인식이 있다. 해외 웹사이트에는 ‘한국어 닉네임을 가진 게이머가 혼자서 적을 학살했다’ ‘한국 서버에는 이전에 본 적 없는 고수들이 가득했다’는 후일담이 떠돈다. 그런데 한국인 게이머에 비해 ‘한국 게임’의 명성은 세계시장에서 그다지 높지 않다. 국내 커뮤니티에서는 오히려 ‘전형적 한국 게임(또는 김치 게임)’이란 말을 악평으로 쓴다. 한국 게임산업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investing : 세계적으로 게임산업은 ‘코로나19 특수’를 누린 분야였다. 야외 활동이 제한되면서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여가생활 중 하나가 게임이었다. 올해 3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국내 게임산업 규모는 전년 대비 2020년 21.3%, 2021년 11.2% 성장했다. 2022년 게임산업 매출액은 22조2149억원,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팬데믹이 한풀 꺾인 지난해 10.9% 감소했다. 한국 게임산업의 마이너스 성장률은 10년 만이다.

엔씨소프트는 그 가운데에서도 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월8일 발표에 따르면, 엔씨소프트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75.4% 줄었다. 매출은 30.8% 떨어지고 순이익도 50.9% 감소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2월 엔씨소프트 주식은 한 주에 100만원대였다. 지금(3월28일)은 20만원 수준이다. NC 다이노스 야구단 매각설이 일었으나 3월20일 온라인 설명회에서 김택진 대표와 박병무 공동대표는 부인했다. 3월28일 열린 엔씨소프트 주주총회에서는 비판적 질의가 여럿 나왔다. ‘대표작 〈리니지〉의 브랜드 평판이 지나치게 하락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박병무 공동대표는 “지난해 성과는 2022년 대비 아쉬웠다. (중략) 부정적 여론이 형성된 게임에서 탈피한 게임들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 공동대표는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통계자료를 보면 ‘리니지’라는 이름의 게임을 하루에 150만명이 하고 있다. ‘〈리니지〉 때문에 회사가 망한다’는 말은 동의가 어렵다.”

〈리니지〉는 1998년 엔씨소프트가 내놓은 히트 게임이다. ‘한국형 MMORPG(대규모 다중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의 원형이라고 평가받는다. 상대적으로 쉬운 컨트롤과 이용자 간 전투 활성화가 〈리니지〉의 특징이다. ‘리니지라이크(리니지 같은)’ 게임은 몰입하기 쉽고 이용자의 충성도가 높다. 그러나 사행성이 다분하고 과도한 현금 결제를 유도한다는 비판도 있다. ‘게임 아이템이 현금 수억 원에 팔렸다’ ‘60대 게이머가 게임 아이템을 잃고 게임사에 소송을 했다’는 소식은 대개 리니지나 리니지라이크 게임 이야기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26년간 〈리니지〉 시리즈로만 매출 10조원 이상을 올렸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젊은 게이머들은 이기기 위해 현금을 들여야 하는 이른바 ‘페이 투 윈(pay to win, p2w)’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온라인 대형 플랫폼을 타고 한국에 상륙한 해외 게임을 더 선호했다. 중년층은 노년층이 되었고 리니지 주 고객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국게임학회장인 위정현 교수(중앙대 경영학부)는 엔씨소프트를 필두로 한 한국 게임업계의 위기가 예견된 사태라고 말했다. 고질병을 떠안은 채 코로나19의 반사이익만 누리다가 거품이 꺼졌다는 것이다. 위 교수의 말이다. “팬데믹은 업계에 기회였다. 모여든 자금으로 신작 게임을 개발해야 했다. 하지만 게임사들은 코로나19가 가져다준 거품에 취해서 신작을 개발하지 않았다. 엔씨소프트가 그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12월 신작 〈쓰론 앤드 리버티(TL)〉를 내놓았다. 그러나 흥행은 저조하다. 〈TL〉은 ‘확률형 아이템’을 배제했다. 확률형 아이템은 일종의 뽑기로, 사행성 요소로 악명이 높다. 게임사는 ‘p2w’나 ‘bm(사업 모델)’이라는 말로 에둘러 썼지만, 게이머들은 ‘도박’이라며 원성이 높았다. 문제는 〈TL〉의 작품성이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행성을 선호하는 층과 작품성에 집중하는 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잃었다. 위 교수는 “〈TL〉은 ‘중독성 요소를 뺀 〈리니지〉’였다. 잘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팬데믹 호황 멈추자 빈약한 내실 드러나

위기는 엔씨소프트 게임이나 리니지라이크 게임의 차원을 넘어선다. 지난 몇 년간 흥행한 한국산 게임 다수가 작품성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축구 게임이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그 외에 스마트폰으로 하는 가벼운 게임들도 외피를 벗기면 대부분 도박성과 고액 과금이 도사린다. 고질병은 또 있다. 게임 본연의 재미보다는 유행에 올라탔다. 메타버스 열풍이 일례다. 2000년대 초 다중 접속 온라인 게임이 본격적으로 유행할 때부터 이미 메타버스는 ‘실재’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접촉이 떠오르자 뒤늦게 메타버스가 ‘개발’된 것처럼 꾸미는 게임사가 나타났다. 메타버스 다음은 블록체인, 그다음은 NFT였다. 쉽게 이익을 볼 기회를 발견하면서 개발 역량이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게임의 본질’은 도덕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책이나 영화 같은 문화상품이 으레 그렇듯 성과와 직결된다. 지난해 전 세계 각종 게임 시상식은 RPG 〈발더스 게이트3〉이 휩쓸었다. 이 게임은 지난해 9월에 나와 6개월 만에 1000만 장을 판매했다. 개발사인 라리안 스튜디오는 10여 년 전만 해도 게임 개발을 위해 펀딩을 받던 벨기에 중소 게임사였다. ‘고전 RPG’라는 ‘마니악’한 장르를 들고 온 이 게임은 국내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2000만 장 이상을 팔았다. 〈발더스 게이트3〉과 올해의 게임상을 나눠 가졌을 만큼 호평을 받았다. 〈젤다의 전설〉 20번째 작품이지만 시대에 맞춰 시스템을 탈바꿈했다. 마치 OTT처럼, 대형 게임 플랫폼에는 이런 명작들이 계속해서 쏟아진다.

드물지만 국내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나오고 있다. 성적도 좋다. 지난해 나온 해양 어드벤처 게임 〈데이브 더 다이버〉는 국내 게임사인 민트로켓이 만들었다. 대중문화 비평 매체인 〈메타크리틱〉 〈오픈크리틱〉에서 역대 국산 게임 중 최고 평점을 받았다. 민트로켓 모회사인 넥슨은 그간 이용자에 대한 과금 정책으로 비판받아 왔다. 같은 해 네오위즈가 출시한 〈P의 거짓〉 역시 누적 이용자 수 700만명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해외 매출이 높지만 국내 게이머들의 평가도 후하다. 국내 게이머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칭찬’ 중에는 공통된 게 있다. “한국 게임 같지가 않다.” 변신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엔씨소프트는 글로벌 시장과 인공지능 기술에 기대를 건다. 〈TL〉은 4월10일부터 북미 베타서비스를 시작하고 올해 중 해외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창립자 겸 대표는 구글과 AI 분야 협력을 강화하는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3월24일 김 대표는 “새로운 AI 기술을 게임 제작에 적극 도입해 비용의 효율성과 제작 기간 단축을 통한 창작 집중성을 만들어내겠다”라고 말했다. 해외 진출이나 AI가 변신을 통한 반등일지, 또 다른 수렁일지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여전히 ‘MMORPG 명가’ 엔씨소프트를 믿고 싶어 하는 이들은 있다.기자명이상원 기자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게임#엔씨소프트#리니지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