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영화<노량>의 핵심은 1958년이라는 순간이다.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임진왜란이 7년으로 마무리되는 걸 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 특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장수들마저도 전쟁의 종료 시점을 바라보는 의견이 분분했다. 혹은 의도적으로 달리 보려 했다. <노량>에서 중심이 되는 세 명. 조선의 이순신(김윤식), 명의 진린(정재영), 왜의 시마즈(백윤식)의 종전에 대한 시각 차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관통한다.

경상도에 3개 성에서 농성 중이던 왜군은 히데요시의 철군 명령을 듣게 된다. 순천에 고립된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며 화친을 제안한다. 이미 끝난 전쟁인데 서로 힘 빼지 말고 적당히 길을 터달라는 것이다. 명나라에서 파견된 진린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거래다. 히데요시가 어린 아들만 남기고 사망하며 다시 혼란에 빠질 일본은 당분간 명나라를 위협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린은 ‘이 전쟁은 이미 끝난 전쟁’이라고 선포한다.

시마즈는 ‘이순신을 잡아야 이 전쟁이 끝난다’는 입장이다. 살마군이라 불리며 조선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지만 결국 조선 정벌이란 최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야심이 가득한 도쿠가와는 일본에서 힘을 비축하며 호시탐탐 정권을 노리고 있다.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도쿠가와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만회할 결정적인 전공이 필요하다. 7년간 일본군을 괴롭힌 이순신보다 더 큰 재물은 없다.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적들을 살려 보내서는 올바로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말한다. 조명연합군이 결성된 상태지만 시마즈, 고니시와 결전을 준비하는 이순신과 전쟁을 피하고 싶은 진린은 부딪힐 수밖에 없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는 진린의 간곡한 제안에도 전쟁이 끝났다는 사람과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사람의 입장 차는 마지막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이순신의 반대편에서 <노량>의 초반을 이끄는 악당은 진린이 될 수밖에 없다.

진린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는 된다. 조선을 지키라는 황제의 명도 수행했고 왜군은 자발적으로 철군 중이다. 임금인 선조조차 바라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려는 이순신의 진의도 의심스럽다. 엄청난 전공을 올렸지만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선조의 질투와 견제에 백의종군의 수모를 겪고 아들까지 잃은 이순신의 개인적인 한풀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올바로’ 전쟁을 끝내는 게 무엇인지 와닿지 않는다. 관객의 시선도 다르지 않다.

<명량>, <한산> 그리고 <노량>

앞선 <명량>, <한산>은 전투의 명분이 명확했다. <명량>은 해상권을 제압하려는 왜군과의 필연적인 전투를 그렸다. 이순신은 왜군과도 싸워야 했지만, 조선과도 싸워야 했다. 칠천량해전에서 대패로 풍비박산 난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게 편입하라는 선조에 요청에 이순신은 ‘신은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는 상소를 올리며 거절한다. 그리고 아무런 지원도 없이 수군을 재건하고 고작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막아낸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명분이 확실한 처절한 전투다.

임진왜란 발발 첫해인 1592년이 배경인 <한산>에서<명량>만큼의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거북선이라는 최신 기술과 함께 잘 정비된 최정예의 수군을 이끌기 때문이다. 최고의 명장이 질 수 없는 전투를 앞둔 상황이라 <한산>에서는 적장인 와키자카를 세심하게 갈고 닦아 이순신 장군에게 버금가는 명장으로 만든다. 원균이라는 희대의 졸장은 부지런히 이순신의 발목을 잡는다. 능력 있는 적장의 공격, 쓸모없는 아군의 자폭을 뚫고 마침내 펼쳐낸 학익진으로 왜군은 치명타를 입고 평양까지 진격했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된다.

<노량>은 조선의 명운을 걸고 12대 133의 불리한 전투를 했던 <명량>의 절체절명의 위기, 학익진으로 대표되는 <한산>에비해 내세울 게 적다. 그래서 영화는 실마리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 시마즈를 역대 최강의 적장으로 설정하고 이순신에 대한 조정의 견제를 꾸준히 언급한다. 그러나 위기는 쉽게 고조되지 않고 명분은 여전히 흐릿하다. 전투의 끝이 무엇인지는 전 국민이 알고 있다. 전투의 카타르시스가 없다면 남은 건 결국 이순신이다.

이순신으로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열도 끝까지 밀어부쳐야 한다는이순신의 주장은 진린, 시마즈 그리고 조선의 대신들과 달리 정략적으로 ‘전쟁 이후’를 보지 않았던 덕분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수급으로 전락한 무고한 백성들, 몇 년째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병사들, 어느덧 곁을 떠나버린 동료들이 겪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는 방법은 다시는 왜군이 조선을 넘보지 못하도록 철저히 몰아부치는 방법뿐이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충신의 못다 한 말

오로지 백성을 바라보았기에 이순신은 진린이 겨눈 황제의 칼 앞에서도 당당했고,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철천지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담담하게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전쟁 이후를 바라보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전쟁 이후를 생각한 현명함, 백성을 향한 연민과 충성을 북채삼아 초극의 의지로 두드리는 전장의 북소리는 그만큼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하지만 이런 질문도 던질 수도 있다.이순신이 아니라 강감찬이나 권율, 을지문덕이었다면. 그런 역사 속 인물도 아닌 완전한 가상의 캐릭터라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북소리에 감동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보다 긴 10년이란 세월을 거쳐 뛰어난 특수효과와 고증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죽음을 그려냈지만 이를 온전히 영화 안에서 끌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량>은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는 장군의 말로 끝난다. 이 대사를 듣기 위해 극장을 찾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걸작은 결말을 알고도 다시 찾게 되듯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가슴 한편에 이 유언을 품고 있다. 전하지 못한 말이 남았거나, 행하지 못한 일이 남은 대장별이 밝게 빛날수록,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았던 충신의 필요가 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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